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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악의 선택

한자 ‘선(選 选)’으로 천기(天璣)를 보다 -미국대선(大選)

글/ 심승(心升)

【정견망】

성인(聖人)께서는 “한자는 신이 만든 것”이라 했다. 반면 무신론자들은 “이것은 미신으로 황당무계한 말”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 특정한 한자의 구조를 가져다가 그것과 잘 맞아떨어지는 사실(事實)과 대조할 때 어떤 이는 견강부회(牽强附會) 또는 우연의 일치라고 말한다. 하지만 한자와 사실의 우연한 일치는 너무나 많다.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를 보고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음을 보듯이 누가 어떻게 보는가는 자신의 자유이고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강요할 수는 없으며, 결코 중공 사당(邪黨)처럼 사람을 감금시켜 세뇌할 수는 없다.

어느 날 필자가 NTD TV를 보다 화면 자막에 ‘선(選)’이 크게 나온 것을 보았는데, 이 글자 안에 ‘공(共)’이 들어있는 것을 보고 흠칫 놀랐다. 고인(古人)이 글자를 만드는 것은 아주 근엄하며 도리가 있는데 절대 함부로 붓을 놀린 게 아니다. 그렇다면 왜 이 안에 ‘共’이 들어있는가? 설마 중공이 말하는 것처럼 중국인들이 사당(邪黨)을 선택했다는 말인가?

기왕에 중국인들이 정말 사당을 선택했다면(사실은 중공이 중국인들을 납치한 것임) 고인이 한자를 만들 때부터 이미 오늘날 중공의 출현을 예언하고, 또 그것을 선택함에 어떤 이로움과 폐단도 있는지, 글자의 함의 속에 표명하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염두를 움직이자 어디서 온 영감인지 몰라도 마치 지혜가 활짝 열린 것 같았다. 즉, ‘共’ 위에 있는 ‘巳’가 두 개는 그 모습이 마치 두 마리 작은 뱀처럼 보이는데 뱀이 호시탐탐 노려보면서 머리를 치켜든 흉악한 모습이다.

그렇다면 巳에 담긴 함의는 무엇일까? 전통 간지(干支)이론에 따르면 사는 12지지(地支) 중 6번째가 되고 오행에서는 화(火)가 되며 색은 붉은 색이고 모습은 뱀이다다. 서양 기독교 문명에서 뱀은 유혹과 마귀를 상징한다.

사실 모든 정도(正道)와 정교(正敎) 수련에서 뱀은 마귀의 상징이다. 원래 고인이 이 글자를 만들 때 우리에게 알려준 것은 중공을 선택하는 것은 바로 유혹과 마귀를 선택하는 것임을 알려주신 것이다. 게다가 사(巳)는 사(死)와 발음이 같으니 중공을 선택하면 바로 죽음을 선택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두 개의 ‘巳’는 어떤 문제를 미리 알려주는가? 중공은 일관되게 자신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신봉한다고 표방해왔다. 마르크스는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사악한 이론의 비조이자 창조자이고 레닌은 그것을 실천한 자니 하나는 마르크스요 하나는 레닌이니 두 마(魔)가 머리를 들고 나란히 서서 인간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두 개의 ‘巳’에 담긴 우의가 아닐까?

또 단독으로 ‘巽’자를 떼어 보면 이것은 또 팔괘(八卦)에서 동남방을 가리키는데 그렇다면 왜 이 글자 속에 ‘共’이 들어있을까?

자세히 생각해보면 애초 중공(中共)이 자리를 잡은 곳이 중국 동남방인 상해, 강서(江西), 정강산(井岡山) 일대이니 바로 팔괘 중에서 ‘손(巽)’의 방위에 해당한다.

아, 이 얼마나 현묘한가! 고인이 만든 하나의 글자가 시공을 초월해 오늘날 인류에 대한 사당의 해악을 모두 폭로하고 있는 게 아닌가! 매 하나의 한자는 모두 한 권의 천서(天書)로 정말이지 현묘하기 그지없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고인이 이 ‘선(選)’자를 만든 것은 단지 우리에게 말법(末法)말세(末世)에 중국에 하나의 사당이 출현하는 것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그것이 인간세상을 화란(禍亂)시키는 악마임을 알려주고 있다.

여기서 나는 또 몇몇 한자들을 생각해보았다. 그중 하나가 ‘편(騙)’자다.

나는 일찍이 《마귀의 계략(魔鬼的圈套)》이란 문장에서 ‘편(騙)’자에 담긴 함의를 말한 적이 있다. 이곳에서 다시 말하자면 騙은 馬와 扁의 결합인데 마(馬)는 바로 마르크스(馬克思)를 가리킨다. 또 ‘扁’은 ‘编’과 발음이 같다. 그러므로 두 글자를 합하면 마르크스가 한 세트의 사악한 이론을 만들어 사람을 속인다는 뜻이 된다. 이는 신(神)의 뜻인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인가? 왜 좌변을 견(犬)이나 양(羊)으로 하지 않고 하필 마(馬)란 말인가?

고인이 애초 세상에 마르크스란 이름을 가진 큰 사기꾼이 출현할 것임을 알고 글자를 만들 때 그런 뜻을 담았는지에 대해 여기서는 논하지 않겠다. 하지만 역사가 이미 증명하다시피 확실히 마르크스는 큰 사기꾼으로 그야말로 ‘편(騙)’자의 함의에 부합한다. 바로 이 희대의 사기꾼이 한 세트의 완전히 사악한 이론을 날조했는데, 얼핏 보면 완벽해 보이는 큰 올가미를 날조해 무려 한 세기동안 인류를 속여 왔고, 또 이것으로 무장한 중공이 중국인들을 더 잔혹하게 유린해왔다.

여기서 ‘共’이란 글자에 대해 한번 살펴보자. 이 글자는 단독으로만 보면 아무런 폄하하는 뜻도 없다. ‘동(同)’과 결합하면 공동(共同)이 되는데 역시 중성적이다. 함께 일을 잘하면 당연히 폄하하는 뜻이 없지만 함께 나쁜 일을 저지르면 폄하하는 뜻이 된다. 그러나 고인이 글자를 만들 때 이 글자를 사당(邪黨)에 사용하기만 하면 모두 폄하하는 뜻이 있도록 했다.

우주 시공(時空) 중에서 옛 성현(聖賢) 창힐(蒼頡)은 천목(天目)이 열려 있었다. 그는 시공을 초월해서 오늘날 중국 대륙에 사당(邪黨)이 출현해 인간 세상에 화란을 입히는 것을 보았다. 이에 글자를 만들 때 이것에 모종의 폄하하는 뜻을 한자 구조 속에 끼워 넣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아주 많은 예를 들 수 있다.

가령 ‘이(異)’자는 위에 ‘전(田)’이 있고 아래에 ‘공(共)’이 있다. 전은 당연히 토지란 뜻이며 또는 심전(心田)이다. 이 글자가 알려주는 것은 대지 위에 사당(邪黨)이 출현하면 그것이 바로 변이된 것이란 뜻이 아닌가? 사당이 백성들의 토지를 공유하려 할 때 인류를 변이시켰고, 사람마음에 일념이 생겨 인민의 토지를 공유하려 할 때 그것은 바로 진정한 인류가 아니라 원숭이를 조상으로 하는 수인(獸人 짐승인간. 겉모습은 사람모양이지만 마음은 짐승과 같기 때문에 짐승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또 쌀(米)은 원래 아주 좋은 물건이지만 이 글자에 異를 더하면 분(糞 간체로는 粪)이 된다. 간체로는 米와 共을 더한 것인데 아시다시피 똥이란 뜻이 된다. 무엇이든 공(共)과 만나면 나쁜 뜻이 되고 만다.

또 폭력을 뜻하는 ‘폭(暴)’이란 글자는 위에는 태양(日)이 있고 아래에 물이 있지만 중간에 共자가 하나 끼어들어갔다. 해는 불을 상징하니 위에는 불(火)이고 아래는 물(水)이니 이것을 주역 괘상으로 보자면 수화미제(火水未濟)가 된다. 이 괘는 흉한 괘에 속한다. 여기에 담긴 의미는 아주 명확한데 바로 이 暴은 중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신(神) 또는 고인은 애초부터 중공이란 바로 폭력혁명으로 인류에게 재난을 가져다주는 물건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수천 년 전의 고인이 어떻게 20세기 지구상에 폭력혁명을 획책하는 공산당의 출현을 알았단 말인가? 이것이 만약 신의 뜻이 아니라면 또 어떤 방법으로 해석이 통할 수 있는가? 이것이 우연의 일치란 말인가?

한자(漢字)는 진작부터 우리에게 중공이 악마임을 알려주었으니 번체자에도 있고 간체자에도 있다. 최근 인터넷에 한편의 문장이 올라왔는데 간체자 도(导 번체로는 導)다. 위의 ‘巳’는 이미 앞에서 설명했다시피 붉은 뱀이고 서양인들은 붉은 용이라 부른다. 성경 요한계시록에서는 중공을 의미한다. 사마(蛇魔 뱀마귀)가 두목이 되었으니 사람을 어느 곳으로 이끌고 가겠는가? 이는 현재 인류사회의 문화가 마귀의 이론을 사용해 한걸음씩 마귀의 길로 이끌려가고 불구덩이 속으로 이끌려감을 설명하는 것이 아닌가?

원래 고인이 만든 번체자 도(導)는 위에 ‘道’가 있다. 즉 우리 사람이 따르고 존중해야 할 표준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도(道)란 뜻이다. 그렇다면 도란 무엇인가? 도가에서는 진(眞)을 말하고 불가에서는 선(善)을 중시하며 파룬따파에서는 진선인(眞善忍)을 말한다. 이것은 사람보다 높은 수련의 도를 말하며 또 사람이 되는 도(道)도 있다. 바로 인(仁), 의(義), 이(理), 지(智), 신(信), 충(忠), 효(孝), 절(節) 등이 그것이다.

이 밖의 것들은 바로 왜문사도(歪門邪道)가 되며 ‘도(道)’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사문왜로(邪門歪路 사악한 문의 굽은 길)라 한다. 사당은 투쟁, 살육, 폭력, 아귀다툼, 기만을 말하고 무신론을 말하며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을 말한다.

성인이 우리더러 따르라고 한 것은 정법(正法)정도(正道)지만 공산당이 우리더러 가라고 하는 것은 한 갈래 사문왜로다.

단지 현재 중공 사회의 학교교육, 인터넷 매체 등만 보아도 우리는 곧 정통적이고 전통적이며 선량한 문화이념이 비판받고 있고 제창하는 것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투쟁, 점유, 약육강식, 교묘한 수단이나 힘으로 약탈하는 등의 이념이다. 각 업종마다 선전하고 경영하는 이념은 돈 아니면 색정(色情)이다. 이를 간단히 말하면 ‘도(导)’라는 글자와 맞아떨어진다.

‘도(导)’에서 다시 ‘진(进)’을 생각해보자. 진(进)의 번체는 ‘진(進)’으로 갈수록 더 좋아지고 아름다운 경치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하지만 간자체 진(进)은 사람을 우물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두 한자(進과 进)의 변화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지금의 이런 변이된 문화는 한 걸음 한 걸음 중국 전통의 신전문화를 훼멸하려는 것으로 중국인의 도덕을 변이시키고 패괴시켜 관직에 있는 자는 탐오하지 않는 이가 없고 장사를 하는 사람은 곳곳마다 짝퉁을 만드는데 지금의 중화대지는 하늘은 맑지 않고 물도 깨끗하지 않으며 인심마저 나쁘게 변해 버렸다.

세상에는 무릇 나빠진 것은 모두 도태된다는 그런 하나의 이치가 있다. 이렇게 큰 면적으로 인심이 나쁘게 변했다면 곧 재난이 닥치게 된다. 중공은 계획적이며 의도적으로 중국인들을 사악(邪惡)으로 향하도록 이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것이 지금 파룬궁(法輪功)을 박해하면서 강력한 선전기구를 동원해 파룬따파에 대한 거짓말을 날조하고 대법 사부님을 모함해 몇십 억의 사람들을 독해(毒害)시켜 사람들이 장차 만겁(萬劫)에도 헤어나기 힘든 경지로 끌어들이고 있다.

사당은 늘 자신의 만세(万岁)를 외쳐왔다. 하지만 여러분이 보다시피 ‘万岁’라는 두 글자는 무엇인가? 만(万)은 ‘一’과 ‘刀’의 조합이며, 세(岁)는 山과 夕의 조합이다. 그렇다면 ‘사당만세(邪党万岁)’에 담긴 뜻은 사실 산 아래에서 큰 칼을 든 한 무리 강도란 뜻이니 자기만세란 오히려 다른 사람을 만겁에도 헤어나기 힘든 사지(死地 사실은 그것이 먼저 지옥에 떨어진다)로 몰아넣는다는 뜻이다. 이는 요한계시록의 예언과도 일치하는데 즉, 붉은 용의 인기(印記)를 받은 사람[즉 중공을 향해 선서한 사람들]은 크건 작건 모두 대 심판이 도래할 때 하느님의 분노의 독주를 마셔야 하며 지옥에 빠져 영원히 되살아날 수 없다(이는 요한계시록의 대략적인 뜻이다).

파룬궁 수련자들이 진상을 알리는 이유는 사실 사람을 구하는 것으로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중공이란 마귀의 정체를 똑똑히 알리고 중공에서 멀어져 당단대(黨團隊 중공 공청단 소선대)를 탈퇴하고 파룬따파하오를 기억한다면 반드시 전화위복이 될 것이다.

여기서 아마 어떤 사람은 한자(漢字)는 단지 고인 또는 지금 사람들이 마음대로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며 애초 글자를 만들 때 그렇게 깊이 생각하기란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위의 내용은 당신이 억지로 덧붙인 것이 아닌가? 라고 말할 것이다. 이 역시 이상할 게 없는데 사람들은 중공 무신론의 독해를 받아 역사와 정통문화에 대해 무지하며 육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우리 현실생활 속에 반영되어 오는 현상에 대해 종종 ‘미신’이란 두 글자로 가로막고 더는 그것의 깊은 뜻은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사람의 사상은 자신의 대뇌에서 만들어낸 것이라 여기지만 사실 아주 많은 것들은 다른 공간에서 오는 신의 정보이다.

2015년 7월 15일 인민(人民)에 《일찍이 세상을 진동시킨 불가사의한 기이한 뉴스(一个不可思议的奇闻曾轰动世界)》라는 문장이 실린 적이 있다. 문장 중에 로즈메리 브라운(Rosemary Brown)이란 여성은 뛰어난 음악들을 창작해 일류 작곡가로 당시에 큰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은 그리 큰 능력이 없고 이 악곡들은 이미 사망한 저명한 작곡가들의 지도로 나온 것으로 자신은 다만 그것을 녹음하고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또 1931년에 프랜시스 밀러(Francis T Miller)가 지은 《에디슨전기》에는 “만약 내가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면 이는 나의 지식을 모독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 작품의 작가도 지적했다시피 에디슨에게 만약 신의 계시가 없었더라면 즉 그를 이끄는 힘이 없었더라면 그는 결코 물질세계의 신비를 통찰하는 비범한 두뇌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고인이 글자를 만든 것과 중공의 간체자는 서로 다른 형식의 정보를 녹음하고 기록한 것이 아닐까? 혹은 글자를 만든 사람에게 그렇게 심오한 동기가 없었을지라도 다른 공간의 신의 뜻이 그의 두뇌에 들어왔다면 글자를 만든 사람은 자신이 생각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을까!

동서고금의 일체는 전부 하늘이 안배한 것으로 이것을 또 법칙이라 부를 수 있다. 하늘의 안배는 한 걸음 한 걸음 오늘날에 이르는 법칙이며, 이 법칙이 바로 일찍이 한자 속에서 드러난 것이다.

고인에게 한마디 말이 있는데 “아는 사람은 비결을 보지만 모르는 사람은 구경만 한다(會看的看門道,不會看的看熱鬧)”는 것이다. 그러니 모르는 사람이 적당한 이유를 찾아 반박하는 것도 탓할 게 아니다. 네 문에 포고문을 붙여놓아도 늘 글을 모르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四門貼告示,總有不識字的). 믿고 믿지 않고는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렸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63270